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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칼럼

월간민화 편집국장 유정서
2016.06.29 14:25

남한강 줄기 유유히 휘감아 흐르는 고아한 절집 여주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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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신륵사는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이 창조한 수려한 강변 풍경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드문 강변사찰로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수많은 국보급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향기로운 문화재사찰이기도 하다.

 

수려한 강변 풍경의 화룡점정

 

조선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유명한 저서 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강변마을로 대동강변의 평양과 소양강변의 춘천, 그리고 남한강의 줄기인 여강(驪江)이 흐르고 있는 경기도 여주를 꼽았다. 그가 이 땅의 하고 많은 강변 마을 중에서 특히 이 세 고장을 ‘살만한 고장’의 으뜸으로 꼽은 이유는 ‘그 강들로 인해 기름져진 넓은 들판이 강가에 펼쳐져 있는 까닭’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여주는 지금도 여강으로 인해 기름져진 너른 들판에서 자란 맛 좋은 쌀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런데 여강은 이렇게 여주의 땅을 기름지게 했을 뿐더러 그 강변을 따라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 만들어 놓기도 했다. 여강이 창조한 절경 중 첫 손으로 꼽을 만한 곳이 바로 고찰 ‘신륵사’가 자리한 강변의 풍경이다. 신륵사는 이 수려한 강변 풍경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이루고 있다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사찰이다.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남한강의 상류인 여강의 물줄기가 치마폭처럼 휘감아 흐르고 있는 그윽한 풍경이 참으로 일품이다.


신륵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문헌상의 증거가 없어 확실히 알기 어렵다. 다만 고려 말까지도 이름 없는 작은 시골 절집에 지나지 않았던 신륵사가 경기도를 대표하는 명찰(名刹)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까지 지냈던 명승(名僧)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입적한 이후의 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 기록에 따르면 1376년,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 법회를 열었는데, 그를 흠모하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모여들자 이를 부담스러워한 고려 조정이 그에게 경상도 밀성군에 있던 영원사로 자리를 옮겨가도록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었던 나옹은 회암사를 떠나 영원사로 가던 중 건강 상태가 몹시 악화되어 근처에 있는 작은 절 신륵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만 이곳에서 입적(入寂)하게 된다. 그의 시신도 이곳에서 다비되어 사리탑에 봉안되었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고승 나옹이 여기서 입적하고 그의 사리탑까지 세워지게 된 것만으로도 신륵사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질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옹의 입적을 계기로 그의 부도를 비롯, 수많은 전각들이 새로 지어지거나 중수되면서 비로소 당당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서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이 이곳 여주로 옮겨지게 되자 신륵사는 왕릉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중창에 들어간다. 성종 3년, 1472년 2월에 시작된 중창불사는 8개월만인 그해 10월에 끝났다. 규모는 옛 것을 수리한 것과 새로 지은 것을 합쳐 2백간에 이르는 당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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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적 성격 강한 독특한 비보사찰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사찰이 그러하듯 신륵사 역시 임진·병자 양란으로 당시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고 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부 전각들이 복원된다. 현재 신륵사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는 입구를 겸한 누각인 구룡루를 기점으로 남쪽을 향해 탑과 법당이 일직선으로 서 있고 그 좌우에 승방(僧房)이 자리 잡은 단출한 형태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대체로 조선 후기에 중창된 작은 규모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그러나 신륵사의 구조는 이 핵심부의 가람배치만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렵다. 이외에도 동쪽 강변에는 웅장한 규모의 전탑(塼塔)과 작은 삼층석탑, 강변 누각 등으로 이루어진 유적군이 있고 극락보전 뒤쪽 봉미산 중턱쯤에는 보제존자의 부도와 탑비를 포함한 국보급 석조유물군이 있다. 신륵사는 크게 이 세 권역으로 나누어 둘러보게 된다.


우선 신륵사의 동쪽 강안(江岸)은 신륵사를 찾았을 때 대체로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강변 특유의 풍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권역에 있는 2기의 탑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탑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탑으로 신륵사의 독특한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소중한 유적들이다.
먼저 강변의 바위 위에 올라앉은 아담한 3층 석탑은 그 맞은편에 있는 시원스런 누각 강월헌(江月軒)과 함께 보제존자 나옹과 관련된 유적이다. 나옹이 입적하자 바로 이곳 강안에서 다비식을 치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작은 탑과 누각을 세운 것이다. 고승의 다비처에 기념탑을 세우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던 전통이다. 경주의 낭산 기슭에는 ‘능지탑’이라 불리는 이색적인 탑이 부분적으로 복원돼 있는데, 이 탑은 대왕암에 안장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 터에 세운 다비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강변의 3층 석탑도 그러한 전통을 이은 고승의 다비탑인 셈이다. 양식상으로는 신라 정형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말의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앞의 누각도 최근에 복원된 것이기는 하되 본래는 3층탑과 함께 나옹과 관련된 유적이다. 누각의 당호 ‘강월헌’은 ‘강변의 달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새겨짐직한 운치 있는 이름이지만, 이 또한 실은 나옹의 별호(別號)이다. 나옹을 기리는 기념물인 것이다.

이 권역에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은 강변 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5층 전탑이다. 전탑은 말 그대로 화강암이 아니라 벽돌로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우리나라 전탑의 전통은 중국의 벽돌탑을 돌로 모방해서 쌓은 이른바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해 통일신라와 고려조를 거치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륵사 5층 전탑은 현재 남아있는 전탑 중 유일하게 경상도 지역을 벗어난 곳에 세워진 탑이다.


무릇 탑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의 하나로 사찰의 중심부, 즉 법당의 앞에 세워지는 것이 올바른 법식이다. 그러나 이 탑은 사찰의 중심부를 벗어난 외딴 강변에 홀로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일반 탑과는 성격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탑의 또 다른 용도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상 무언가 부족한 기운을 보완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세우는 ‘비보(裨補)’용 탑이 있다. 바로 이 탑이 그런 용도로 세워진 탑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과연 이 전탑은 무엇을 위한 비보탑이었을까? 신륵사에 관한 옛 기록들에는 여강의 범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 기세 또한 대단해 피해 또한 막심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이 전탑은 발밑을 흐르는 여강의 사나운 물길을 억눌러주기를 바랬던 이 지역 민중들의 바람에 의해 세워진 탑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사찰의 이름 또한 그러한 추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신륵(神勒)’은 ‘무언가 신(神)적인 것에 굴레를 씌운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 ‘신적인 것’이 바로 여강의 범람을 말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부터 신륵사 자체가 무엇보다 여강의 범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비보사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 서 있는 5층 전탑이야말로 신륵사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으뜸가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봉미산 언덕에 울려퍼지는 ‘신륵모종’

두 번째 권역인 사찰의 중심부에도 보물 180호로 지정된 ‘조사당’, 보물 235호인 다층석탑, 경기도유형문화재 128호 극락보전 등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중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흔적은 법당인 극락보전 앞에 서 있는 ‘신륵사다층석탑’이다.
모두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불교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탄압을 당한 시기였다. 여러 면에서 창의적인 시도가 이루어질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신륵사의 중심 탑인 다층석탑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탑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걸작의 반열에 놓일 만한 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석탑은 재질이 거의 대부분 화강암인데 비해 이 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또한 옥개석(지붕돌)과 몸체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탑은 그 둘이 한 장의 돌로 이어져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를테면 ‘쌓는다’는 탑의 일반적인 개념을 벗어나 조각을 하듯 ‘새겨낸’ 공예적 개념이 강한 이색적인 탑인 것이다. 특히 2층 기단의 탑신에 새겨진 꿈틀거리는 용무늬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날아오를 듯 힘차고 정교하다. 기본적인 형태에서는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독특한 변형을 가미한 창의적인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돌아볼 곳은 세 번째 권역인 봉미산 중턱의 석조유물 무리이다. 계단을 통해 한참을 올라간 산 중턱에 넉넉하게 조성한 평지에는 흔히 ‘보제존자 석종(石鐘)’이라고 불리는 사리탑과 그 사리탑의 내력을 새긴 탑비(塔碑), 그리고 사리탑 앞을 지키고 있는 석등(石燈)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개의 유물 모두가 보물로 지정된 국보급 유물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으로 신륵사를 상징하는 인물 나옹화상의 사리가 안치된 부도이다. 부도의 모양이 마치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종형(鐘形) 부도’ 혹은 아예 ‘석종’이라고 부른다. 이 형태는 우리나라 부도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8각원당형 부도’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양식이다. 보제존자 석종은 육중한 질감과 깊은 안정감으로 우리나라 석종형식의 부도를 대표하는 유물로 꼽히고 있다.
한편 그 앞에는 부도를 지키는 석등이 서 있다. 팔각원당형의 정형 양식에 극히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걸작이다. 기단은 화강암이고 화사(火舍)는 대리석인데, 질이 무른 대리석의 특징을 살려 천의를 휘날리며 날아오르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했다. 날렵하고 화려한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난다.
신륵사의 동쪽 강변이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면 보제존자의 숨결이 서려있는 이곳은 신륵사에서 가장 고즈넉하고 조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문득 맞이하는 석양이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 없다. 이즈음 들려오는 종소리, 신륵모종(神勒暮鐘)이 여주팔경(驪州八景)의 으뜸이다.

 

 

글·사진 : 유정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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