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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칼럼

월간민화 편집국장 유정서
2016.07.05 16:08

영월 청령포, 어린 임금 단종의 비극 서린 고독한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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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청령포

강원도 영월, 서강이 휘돌아 흐르는 곳 청령포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가슴 아픈 옛 사연이 아로새겨진 뜻깊은 유적이다.

피비린내 나는 조선 왕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어린 임금 단종의 그 깊은 고독의 내음이 서려 있는 곳.

서강의 푸른 물은 그 아픈 사연은 싣고 수백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지금도 흐른다.

 

권력다툼의 희생양 된 가여운 임금의 넋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그림같이 휘감아 흐르는 서강西江 가의 야트막한 언덕 위엔 이렇듯 귀에 익은 옛 시조 한 수가 새겨진 비석이 강물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그 옛날 비운의 임금 단종을 영월에 유배시키고 돌아오던 왕방연이라는 관리가 서글픈 심사를 가눌 길 없어 이 강가에 앉아 눈물로 읊조렸다는

시다. 참으로 본의 아니게 한 때의 지엄한 주상에게 가혹한 벌을 베풀어야 했던 하급 관리의 비통한 심사가 구구절절 배어있다. 그것은 지은이의 개인적인

감상이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 어린 임금 단종의 비극을 소리 없이 지켜보던 일반 민중의 보편적 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의 죽음은 조선조의 왕실사王室史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모두 알다시피 그의 죽음은 우선 조카의 왕위에

눈독을 들인 야심에 찬 숙부 수양대군의 욕심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세종世宗에 의해 확립된 엘리트 관료 중심의 통치체제에

불만을 품은 종친세력宗親勢力과 그를 추종하는 일부 사대부 집단의 반발이 빚은 정변의 회오리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단종을 보위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 의정부 대신을 중심으로 한 관료세력과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종친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어린 임금 단종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 기막힌 싸움에 휘말려 끝내 억울하게 희생되고 만 셈이다.
단종은 세종의 치세였던 1441년 7월 23일 문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세종 임금은 뒤늦은 맏손자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죄수를 사면하고

궁궐에서 큰 잔치를 열어 만조백관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단종의 운명에는 짙은 비극의 그림자가

덮여오고 있었다. 아버지 문종의 요절이 그 전조의 하나였다.
세자 시절부터 워낙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서른일곱의 나이로 뒤늦게 떠맡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할 겨를도 없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당시 단종은 12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나 ‘왕실의 법도’에 따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엿새만인 1452년 5월 18일 조선의 6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세자의 신분으로 30년이나 지냈던 아버지 문종에 비하면 엄청난 행운일 수도 있었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비극의 서장이었다.
조선왕실의 법도 상 임금이 너무 어리면 왕이 어른이 될 때까지 왕의 어머니, 즉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작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단종에게는 공식적인 대리인이 없었다. 결국, 죽음을 앞둔 문종의 뜻에 따라 대비 대신 조정의 원로 대신이

수렴청정을 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하자면 ‘부왕의 유지에 따라’ 나라의 권력이 자연스레 의정부 대신을 중심으로 한 신료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문종의 죽음 이후, 권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종친세력이 이런 사태를 그대로 보고 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 정치적 야심이 컸던 수양대군의 반발은 한바탕 회오리를 몰고 올 기세였다. 그러자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신들은 문종의 또 다른 동생인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이 무렵 조정의 권력 구도는 의정부 대신을 중심으로 한 관료집단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안평대군과 신흥 무신 세력 및 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젊은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수양대군의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 결과 대세는 먼저 칼을 빼든 수양대군 쪽으로 기울게 되고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까지 빼앗고 만다. 이어 수양은 세조로 즉위한 지 2년이 되던 해,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혔던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멀리 유배를 보내버리고 만다. 1457년 6월 21일,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무렵이었다. 그때 어린 단종이 영문도 모르는 가혹한 시련에 눈물을 떨구며 유배된 곳이 바로 이곳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였다.
부인은 물론 상궁이나 나인조차 거느리지 못한 혼자 몸으로 영월로 호송된 단종은 첩첩산중, 그 까마득한 유배지에서 세조의 허락도 없이 따라나선 대여섯 명의 하인들과 함께 지내며 깊은 울분과 고독을 삭여야 했다.

 
 

역사의 온기 서린 이끼 낀 옛 흔적들

 

청령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강변에 한 폭의 그림처럼 물 위에 떠 있다. 널찍한 백사장을 앞으로 두르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 반도 형태의 땅이다.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 줄기가 동쪽과 북쪽과 서쪽,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나머지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이곳엘 가려면 지금도 얄궂은 거리나마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한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편에서 저편까지 줄을 이어놓고 사공이 그 줄을 끌어서 움직이는 ‘줄배’를 타고 오갔는데 요즘에는 몰려드는 관광객을 감당할 수 없어 속력이 빠른 동력선을 이용한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미처 운치 같은 걸 느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맞은 편 강안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려 긴 백사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울창하게 하늘을 가린 키 큰 소나무 숲이 우선 방문객을 압도한다. 흡사 한 폭의 수묵화 속에 발을 들인 것 같은 절경이다. 그 송림 한복판에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거처가 자리 잡고 있다. 단종이 살았던 집이나 흔적들은 진작에 홍수로 떠내려가고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빈터로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몇몇 흔적들이 그럴싸하게 복원되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현재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흔적은 유배 기간 단종이 머물었다는 옛집이다. 지난 2000년 4월 새로 지어진 이 어가御家는 의 기록에 따라 나름대로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어가의 위치 및 주거 형태 등 몇 가지 논란거리를 안고 있다. 어쨌든 복원된 어가는 ‘一’자 형태의 기와집으로 지은 본채와 궁녀 등 나머지 식솔들이 묵었다는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방 안에는 당시의 살림살이가 마네킹과 모형들로 재현되어 관광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그밖에 아쉬운 대로 옛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몇몇 흔적들이 어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우선 어가의 담장 한쪽에는 이 언저리가 단종이 머물던 곳임을 알려주는 이끼 낀 낡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즉 ‘단종이 우리 부(영월)에 머물었던 터’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皇命崇貞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燧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즉 영조英祖 39년(1763년) 가을, 어명에 따라 울면서 받들어 쓰고 원주 감영이 세웠다는 말이다. ‘울며 받들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세월이 꽤 흐른 영조임금 당시에도 백성들 간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에 대한 추모의 정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단종과 관련된 또 하나의 비석이 서 있다. ‘금표비禁標碑’가 바로 그것이다. 비바람에 깎여 남아있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돌판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이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동서로 3백 척, 남북으로 4백9십 척 안은 임금이 계신 곳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창살만 없었을 뿐,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나 진배없었던 단종의 고초를 가슴 아프게 전해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발길을 돌려 청령포의 오른쪽을 담장처럼 두르고 있는 산언덕으로 올라가 보면 아찔하게 현기증을 느낄만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발길을 가로막는다. 발아래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초록빛 강줄기가 여간한 장관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옛날 어린 단종에겐 아름답기는 하되, 갈 길을 가로막는 무정한 낭떠러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절벽으로 오르는 언덕 한편에는 작은 돌을 쌓아 만든 나지막한 탑이 있다. 이름 하여 ‘망향탑’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단종은 이 언덕에 올라 멀리 한양의 궁궐과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하나둘씩 돌을 쌓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의 안타까운 심정이 후세에 만들어 낸 전설의 흔적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양쪽 강안을 부지런히 오가는 배만 없다면 청령포는 지금도 보아도 옴치고 뛸 곳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라 할 만하다.
천혜의 비경이자, 천혜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종의 발길을 막아서는 것은 절벽과 물뿐만이 아니었다.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숙부 세조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 거처 언저리에 군사를 붙여 밤낮으로 감시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들은 청령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단종을 무엇보다도 괴롭혔던 것은 아마도 이토록 깊은 고독이었을 것이다.

 
 

푸른 강물에 서린 어린 임금의 그 깊은 고독

 

하지만 이것조차 비극의 종착점이 아니었다. 단종을 귀양 보낸 그해 6월 27일, 불안감에 시달리던 세조에게 또 한 번의 결정적인 밀고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셋째 동생인 금성대군은 처음부터 조카의 왕위를 빼앗으려 일으킨 부도덕한 정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를 세조의 측근들이 그냥 놓아둘 리 만무했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는 곧 멀리 경상도 순흥으로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친형의 야박한 처사에 크게 분개한 금성대군은 유배지인 순흥에서 사람을 모아 모반을 준비했으나 미처 일을 벌이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밀고로 체포당하고 만 것이었다. 주모자 금성대군은 곧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 사건이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단종의 운명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게 한 치명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이러한 복위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았다. 세조는 ‘화근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측근들의 주장을 못 이기는 체 받아들여 마침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만다.
은 숙부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1457년 10월 24일. 청령포에 유배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고작 17세. 실로 곱게 눈감기 어려울 만큼 억울하고 한 많은 최후였다.
어린 단종이 청령포에 머문 기간은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땅에 새겨진 사연은 이토록 짙고도 가슴 아프다. 청령포의 송림 숲을 조용히 거닐다 보면, 깊은 물이 앞을 흐르고 험준한 절벽이 뒤를 막아서는 이 심처深處에서 고독과 두려움에 밤을 지새웠을 어린 임금의 몸서리쳐지는 고독이 오백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지금도 전해오는 듯하다. 복원된 어가의 현판에는 당시의 심경을 읊었다는 단종의 시 한 수가 방문객의 가슴을 아프게도 저며온다.

 

〃천추의 원한 가슴에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서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글·사진 : 유정서 편집국장

출처: 월간민화 www.artmi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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